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가미 히데오 (문단 편집) ===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돌아가다 : 1948년 ~ 1955년 === [[파일:external/www.ritomo.jp/ungiants02.jpg]] 1950년. 왼쪽부터 [[카와카미 테츠하루]], 나카가미 히데오, [[치바 시게루]]. 1947년 시즌 종료 후, [[요미우리 자이언츠]]의 [[미하라 오사무]] 감독이 나카가미에게 교진군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고 주부니혼 구단측에서도 "쟤 어깨가 저래서야 뛸 수 있겠는가?" 라고 의문을 표하며 전력 외 선수로 빼서 방출해 버렸다. 194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돌아온 그는 주부니혼 시절 부상당한 어깨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전반기에는 외야수로 활약했는데 후반기에는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투수로 돌아왔다고 한다. 투수로 복귀하면서 [[슬라이더]]를 배웠는데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희귀한 구종이었고, 이 슬라이더를 정말 잘 던진 선수가 바로 나카가미 였다고 한다. 1948년 부진한 시즌을 보냈지만[* 한편 이 무렵은 [[대한민국]] 정부가 처음으로 수립되었으며, 국적이 또다시 [[미군정]]에서 [[대한민국]]으로 변경된다.], 이듬해인 1949년부터는 일본 야구의 전설이 되어버렸다. 당시 래빗 볼을 도입하면서 반발력이 전 시즌에 비해 넘사벽급으로 올라가 버려 투수들의 평균자책도 껑충 뛰어버린 와중에도, 그 해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 중 나카가미만 유일한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. 1949년 시즌에는 '''평균자책 1위(1.94), 다승 2위(24승), 승률1위(24승 7패 .774), [[사와무라 상]] 수상, 베스트 나인[* [[KBO 골든글러브]]와 같은 것이다. --다만 여기는 수비를 보고 뽑는데-- 논란이 골든글러브 만큼이나 많은 편이다.]에 선정'''되는등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최고의 투수 반열에 올랐다. 이듬해인 1950년에도 360⅓이닝을 던지며 26승 14패, 평균자책 2.44, 33번의 완투승을 기록했는데 이 해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[[퍼펙트 게임(야구)|퍼펙트 게임]]을 달성하게 된다(자세한 내용은 하기에 기재). 이후로도 오오토모 타쿠미, [[벳쇼 다케히코]]와 더불어 교진 마운드 3총사로 불리며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이끌어 나가는 에이스 급 투수로 활약했고 1949년부터 1953년까지는 매 시즌 15승 이상을 기록했다. 그러나 1954년 시즌에는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경기 출장수가 급감하고 1승밖에 챙기지 못했으며 1955년에도 1승에 머무르면서 프로 통산 200승을 채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. 그가 기록한 통산 기록은 '''367경기, 2628⅓이닝, 200승 87패, 승률 .697, 평균자책점 1.90''' 이며, 이중 통산 승률과 평균자책은 현재 일본프로야구 개인통산 최고기록이다. 또한 20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유일하게 2자리 패배를 기록한 투수이기도 하다.[* 150승 이상으로 따지면 180승 96패를 기록한 [[사이토 마사키]]가 있다.][[http://bis.npb.or.jp/history/|참고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